곽종근, 왜 자꾸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는가 — 말은 흔들리고, 기록은 남는다
그레이스헤럴드 / 진종구 칼럼니스트

11월 3일 법정에서 나온 한 줄의 폭로가 정국을 흔들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한동훈 전 대표를 총으로 쏴 죽이겠다고 말했다.” 극적 표현 하나가 갖는 파급력은 컸다. 그러나 정치적 충격과 법적 진실은 다르다. 국가적 판단은 언제나 감정이 아니라 검증 위에 세워진다.
이번 사안의 발단은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의 발언이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공식 진술 절차를 거쳤고, 그 과정에서 표현과 핵심 어휘는 시기별로 변화해 왔다. “의원”이 “인원”으로, “직접 지시”가 “비유적 표현”으로 바뀌는 과정은 가볍지 않다.
국가 중대 사안에서 단어 하나의 흔들림은 사실관계를 뒤흔든다. 기억이 흐릿하다기보다, 기억이 재배열되고 있다는 인상마저 지우기 어렵다.
과거의 녹취록 발언은 더욱 특이하다. 곽 전 사령관이 스스로 언급한 외부 압박 정황, 녹취록 속에 생생한 음성으로 표현된 이른바 “살려면 양심선언하라”는 회유가 있었다는 그의 말은 그의 증언이 순수한 내적 양심의 발로가 아니라 외부 환경 속에서 재구성되었을 여지를 남긴다.
그 시점과 맥락을 고려하면, 그의 기억이 일부 여론·정치 진영이 강조해온 특정 내러티브와 맞춰지는 방향으로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특히 과거 김어준 유튜버가 제기했던 이른바 ‘한동훈 사살설’과 구조적으로 흡사한 발언 형태가 곽종근 전 사령관의 말에 등장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곽 전 사령관의 말이 독립적 관찰의 산물이라기보다, 이미 유포된 프레임과 결합해 재구성된 것이라는 의혹을 낳는다. ‘우연한 일치’라기에는 타이밍과 방향이 지나치게 직선적이다. 회유, 설득, 또는 분위기 조성 속에서 특정 서사에 편입된 기억이 생산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군 지휘 구조 또한 사실의 측면을 비켜간다. 대한민국의 작전·보고 체계는 단단하다. 통신 기록과 지휘 체계, 시간대와 군 투입시기는 오히려 곽 전 사령관과 다른 정황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현재까지 드러난 것은 오직 그의 말뿐이다. 기록이 있는 주장과 기록이 없는 주장은 무게가 다르다.
'한동훈을 총으로 쏴 죽이겠다'는 발언을 했다는 그 자리에 20여명의 군 지휘관이 있었다는데, 그의 발언을 뒷받침하는 증언이 단 한 사람에게서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주목된다.
거대한 사건을 설명하는 말이 정작 단 한 사람의 단독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현상은, 사실의 고립이 아니라 진술의 고립을 뜻한다. 오직 한 사람의 증언만 허공에 떠돌아 다닌다면, 이는 진실의 증명이 아니라, 진술의 고립이 만들어내는 공백이다.
결국 핵심은 단순하다. 곽 전 사령관의 발언이 ‘기억’의 결과인지, 아니면 이미 사회적으로 유통된 정치적 내러티브와 결합하여 새롭게 형성된 진술인지 여부다.
여론의 압박과 회유 가능성을 스스로 언급한 인물의 말이 특정 방향으로 정렬되기 시작했다면, 그 진술이 자율성과 독립성을 잃었을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진실은 외부 환경에 휘둘리면 사실이 아니라 연출이 된다.
민주주의는 말이 아니라 기록으로 굴러간다. 감정이 아니라 증거가 기준이 된다. 충격은 빠르지만, 진실은 느릴 수 있다. 그러나 느림이 결코 패배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단이 아니라 확인이다. 정치는 이야기로 움직일 수 있지만, 국가는 증거로 움직인다.
한 사람의 진술이 역사의 판단을 좌우할 수 없다. 말은 흔들리고, 기록은 남는다. 역사는 언제나 기록의 편에 섰다.